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엔비엔푸 전투 (문단 편집) == 개요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그것은]] [[프랑스|코끼리]]와 [[북베트남|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 > 1946년 9월 11일, 호찌민이 <뉴욕타임스> 통신원 데이비드 쇼에브런(David Schoenbrun)과 한 인터뷰에서 > 디엔비엔푸는 우리 군이 싸웠던 가장 큰 전투였고, 거의 1세기에 걸친 항불전쟁에서 우리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그리고 동 전투는 역사상 약소국이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의 침략군을 상대로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 > 보응우옌잡,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 1964년 보응우옌잡 장군이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10주년에 쓴 글이다.]>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 북베트남 정부가 성립되기 전이기에 베트민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과 [[프랑스 제4공화국]] 간의 전투. '''식민지 베트남이 지배자 프랑스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해체되고, 모든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단, 완전히 철수한 건 아니고 프랑스 [[대사관]]과 병원 시설은 남겨두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대세가 기울면서 사이공이 함락되자 완전히 철수했다. 의외로 베트콩들과 북베트남 정규군들이 한국과 프랑스의 대사관 건물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의 삼색기가 꽂혀진 건물은 피할 정도였다. 반대로 일본 대사관 건물은 일본 대사관인 걸 알게 되자 벌떼같이 들어가서 미군과 같이 철수하지 못하고 남은 일본인 대사관 직원들을 구타하고 발가벗겨 광장에 끌어내 돌과 침 세례를 날렸다.(왜 이랬는지는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10600289105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11-06&officeId=00028&pageNo=5&printNo=2059&publishType=00010|기사]] 참고) 완전히 철수해서 비어 있는 미국 대사관도 마찬가지로 약탈당하고 동상들은 전부 부서졌으며 건물은 불에 활활 타올랐다고 한다.] 베트남은 마침내 프랑스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역사적인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남북 베트남의 분할과 20년이 넘는 [[베트남 전쟁]]의 서막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육로로 다른 곳에 연결되지도 않은 [[분지]] 위에 요새를 만들고 정예병들의 전투력과 오직 항공보급 만으로 버텨보려던 프랑스군에 대항해 인력으로 수만 병력의 보급품과 화포들을 정글과 산속으로 운반하고 프랑스군의 눈을 피해 수 개월 동안 포위하여 공격한 베트민군의 눈물겨운 사투가 눈여겨볼 만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